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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글쓰기

누가복음 19장1절~10절,교회를 다녀도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

by 91세 방맹이 할머니 2025.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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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녀도,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누가복음 19장1절~10절

오늘의 성경 큐티 묵상에서는

은혜는 체면을 깰 때 비로소 시작된다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25/4/4, 822일차,  

[살핌]

누가복음 19장1절~4절

구원을 향한 간절한 갈망

누가복음 19장5절~10절

초청받은 죄인, 변화된 삶


[새김]

●교회를 다녀도,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

▶은혜는 체면을 깰 때 비로소 시작된다

.

삭개오의 직업인 세리장은, 로마 제국의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과 더불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 세리는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다 보니, 더욱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왜 예수님을 보려고 했을까? 그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예수를 본 게 아니었다.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했다'는 대목의 헬라어 원문은 εἰδεν Ἰησοῦς τίς ἐστιν으로, “그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려 했다”는 뜻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가까이하시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보자면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의 존재적 관심, 즉 “진짜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키가 작고 사람이 많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단순히 신체적 특성만을 말하지 않는다. 영적, 사회적 상징성이 담겨있는 표현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신체 조건도 사회적 지위나 인물 평가에 영향을 끼쳤다. 키가 작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력의 부재와 무시당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즉, 영적 열등감, 사회적 소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군중은 물리적 장애물이면서도, 사회적 장벽을 상징한다. 외적인 군중은 사회적 시선을 의미하고, 내적인 조건은 자신의 한계를 의미한다. 아마도 삭개오는 스스로 조건도 부족하고, 죄도 많고,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지만 예수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사회적, 영적 소외감과 개인의 한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갈망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출발이 될 수 있다.

이어서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고 나온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προδραμὼν (프로드라몬)이라고 해서 '미리 달려가다’, ‘앞질러 가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다급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성인 남성, 특히 고위직 인물이 공공장소에서 달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체면보다 열망을 택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존심을 버려야 회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앞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지금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기다리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익숙한 자리, 안전한 영역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은, 절박함과 창의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적인 어떤 단점이 있더라도, 창의적인 시도와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있는 곳을 지나가시게 됨으로 그곳에 이르셨다. 이것은 우연히 도착하신 것이 아니라, 정확한 그 시간과 그 자리에 이르렀다는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우연히 스치듯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예정된 순간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절박한 현장 한복판에 도착하신다. 삭개오가 있는 그 자리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삶의 자리, 절박한 자리를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서 삭개오를 바라보신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서 내려다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고 올려다보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시도보다도, 더 깊은 하나님의 시선을 보여준다. 인간이 예수님을 찾는 것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바라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낮아진 자, 체면을 버린 자, 겸손히 주님을 찾는 자를, 고개 들어 바라보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부르실 때, 항상 이름을 부르셨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관계의 시작이자 사명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σπεύσας κατάβηθι (스페우사스 카타베시)라고 해서 ‘지체하지 말고 급히 내려오라’는 뜻이다. 이것은 회개의 핵심이, 미루지 않고 지금 반응하는 것임을 보여주신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신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자면 “나는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한다”(  (δεῖ γὰρ με μεῖναι)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삶에 주도적으로 들어오시겠다는 결정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우연히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은혜의 흐름 속에 나를 위치시키면, 준비된 자리로서 필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특히 의무조동사 ‘δεῖ’의 사용은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신적 필연성을 의미하며 신학적 무게를 더하고 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오는 모습으로, 지체 없는 순종과 회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구원으로 인한 존재 전체의 기쁨을 보여준다.

영접한다는 헬라어 ὑπέδεξατο는 단순한 환대가 아니라 ‘자기 집안 깊숙이 들이다’,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들어오시지만, 문은 우리가 열어야 한다.

그런데 무리가 보고 수군거린다. 여기서 나오는 무리는,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반응, 제도적 시선, 군중 심리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주변 구경꾼들의 시선을 동반한다. 이것은 실제 공공의 도전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동보다, 은혜의 방식 자체에 불만을 품었다. 이것은 종교적 반발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들은 선택받지 못했다. 오히려 죄인 삭개오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기, 질투, 경쟁심, 비교등이 발생한다. 하지만 본래 은혜는 기득권의 종교 시스템, 도덕 우월성, 집단의 경계의식을 흔든다. 그래서 복음은 늘 거부와 오해, 논란을 동반시킨다. 은혜는 항상 체면보다 회개를 선택한다. 

삭개오는 서서 예수님께 말한다. 헬라어 원문으로 στὰς (스따스)라고 해서 단순히 ‘서다’가 아니라, ‘결단의 자세, 공개적인 선언’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대화가 아닌, 진지한 결심의 태도로 공개적인 신앙 고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서 당시 유명한 랍비 정도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표현도 나온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행동을 선언한다. 회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행동이다. 또한 고백을 넘어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다. 여기서 오늘이란, 매우 상징적인 단어이다. 즉, 구원이 미래의 보상이나 종말의 보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임하는 실재적인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죄인이었던 세리장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선언까지도 하신다. 이것은 혈통만으로 하나님 자녀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꼭 교회를 다녀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군중들처럼 선택받지 못할 수있다. 대신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진심으로 회개를 한다면 선택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떠올려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의 삭개오를 보면, 많은 힌트와 단서가 함축되어 있다. 이를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보며, 우리 내면에 새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삭개오와 같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행동이 바뀌며, 삶 전체가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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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름&드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돌아보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세상적인 장벽에 선뜻 먼저 움직이지 못하던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사, 스스로 회심하고 깨닫게 이끌어 주소서.

우리가 하나님 뜻과 의를 바라보며, 먼저 달려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문을 열고, 마음 깊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회심하는 자를 시기 질투하기보다, 우리가 회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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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1절~10절 의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는 개인의 생각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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